“이것도 솔로몬의 잠언이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니라.” (1)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13번째 왕입니다. ‘여호와는 강하게 하신다’는 뜻을 가진 히스기야는 신하들을 시켜서 솔로몬의 교훈들을 모으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가장 이스라엘 나라가 부강하고 힘이 있었던 솔로몬 시대와 약 27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 뒤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라가 나뉩니다.
히스기야가 왕위에 있을 때,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앗시리아는 남유다도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 그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솔로몬의 글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신앙을 강화하여 국난(國難)을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지되었던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는 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이집트를 동맹삼아 앗시리아와 결전을 치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수포(水泡)로 돌아갔고, 결국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학자들은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있었고, 이사야 선지자도 사역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잠언은 솔로몬의 제 1잠언 1-9장과 제 2잠언 10장-24:22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25-29장까지는 히스기야가 편집한 솔로몬의 잠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모은 잠언들이라서 그런지 이 부분에는 왕과 신하, 왕과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 빈번하게 나옵니다. 또 편집된 것이긴 해도 솔로몬의 잠언들이기 때문에 앞에서 나온 잠언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2)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보여 주시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다 이해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선하시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모두 선합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서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알아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몰랐습니다. 단 한 사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요셉만이 알았습니다. 요셉은 바로에게 가서 그 내용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온 나라와 주변까지 대 기근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반면에 앞 일을 모르는 땅의 왕들은 언제나 미래를 대비해야 합니다. 요셉시대의 바로는 자신의 꿈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살펴서 알도록 애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임금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이 땅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알게 해 주셔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일을 살피는 것은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일어나는 세상의 악에 대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치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왕의 영광입니다.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3)
양화진홀 전시관에 가면, 크게 한자로 ‘섭리(攝理)’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섭리의 ‘섭(攝)’자는 ‘손 수(手)’ 변에, ‘귀 이(耳)’자가 3개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행하신 것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들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의 오묘한 섭리에 대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법, 율법은 왕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기준과 판단의 척도로 삼아 나랏일을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왕의 영화(영광)입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4-5)
히브리인들은 은의 제련 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 대장간에서 쇠를 달금질했던 것을 봅니다. 덩어리 쇠를 핀 숯에 가열한 뒤에 오함마로 마구 두드립니다. 그러면, 찌꺼기가 떨어져 나갑니다. 점점 단단한 쇠가 됩니다. 그리고 찬물에 담급니다. 다시 불에 벌겋게 달굽니다. 또 때립니다. 여러 번 반복하면서, 찌꺼기를 제하고 칼도 만들고,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듭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순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할수록 아름다운 작품이 됩니다. 주님께서 쓰시기에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물을 두면 쓸모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정화시키는 하나님의 연단으로 믿읍시다.
세상도 동일합니다. 악한 자들이 권력을 갖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국회의원이나 하다 못해 시의원이라도 정말 정직한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사람을 세웁시다. 그러면, 나라가 평안할 것입니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6-7)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
솔로몬이 3000여 잠언을 지었는데, 300개 정도만 성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자의 말이라고 다 성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 하나님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도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들어본 이미 아는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가 오해하고 잘못 판단할 뿐입니다.
높은 자리는 왕이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야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능력도 되지 않는데, 높은 자리에 있으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도록 성실하게 실력을 기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 화목, 화평을 이루는 지혜 (8-17)
“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8-9)
성도들은 되도록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도 상대에게는 ‘너는 틀리다’ 로 들릴 수 있습니다. 중립적인 표현을 많이 하십시오. 예를 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꼭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은 이렇다 정도만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내가 잘못 판단했을 때, 쉽게 “아 내가 잘못생각했나 보네요.” 하면서 쉽게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틀린 경우, “네 말이 맞네.” 하면서 상대방도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툼을 피하려는 것이 화목, 화평하는 비결입니다.
성도 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나눌 때, “저는 이러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믿습니다.” 라고 하면, 서로 간에 큰 상처 주는 것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잘못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큰 착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가급적이면, 법정에 서는 일이 없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소한 다툼에서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꼭 복수하겠다고 원수맺는 일까지 발전합니다. 비밀이나 약점가지고 이용하지 맙시다. 부부 간에,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지켜야 할 도의가 있습니다. 조심해서 인신공격까지 가지 않도록 합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 (11, 20)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말이 중요합니다. 예로 반대로 했을 때는 마음에 아픔과 상처를 배가시키지요. 즐거운 자에게는 축하와 우스개 소리가 더 기쁨을 줍니다. 반면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지요. 어느 때는 말없이 옆에 그냥 있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에 빈말을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 (14)
팔레스타인 땅은 비가 적습니다. 얼마나 비가 간절한지, 구름을 보면 그 사람들은 비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구름만 지나가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큰 실망입니다. 말로만 하고 그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12)
우리가 성숙한 인격을 갖으려면 연단이 필요한데, 그것이 책망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을 좀 듣는다고 해서, 삐지고 교회를 떠나면, 단련되지 않습니다. 찌꺼기가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잘 받아들이면, 신앙과 인격이 성숙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바르게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이 복입니다.
손흥민 선수를 세계적인 선수로 기른 것은 그의 아버지 손정웅 코치인데, 아주 혹독하게 가르쳤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습니다. 운동을 잘하게 될수록 코치의 조언을 깊이 듣듯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의 조언을 깊이 듣습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 (13, 25)
우리 나라는 추수(秋收)를 가을에 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는 보리는 4월 중순부터, 밀은 6월 초부터 거둡니다. 6월에 벌써 건기가 시작됩니다. 낮에 몹시도 덥습니다. 이 때 농부에게 ‘냉수’는 큰 기쁨이지요. 우리가 받은 복음이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 다시 파송받았으니, 아버지 하나님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15, 28)
‘인내와 절제’의 중요성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려면, 인내해야 합니다. 나랏일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습니다. 교회 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두 번 권면해 보고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아 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80 평생을 참아 주십니다. 그래도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도 참으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쉽게 낙심하고 낙담할 수 있습니까?
전도가 안 된다고 해서, 저주를 퍼붓고 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권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었지만, 그 열매로 바울을 얻은 것 아니겠습니까? 당장에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좀 인내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부터 추스려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우리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 (16-17, 27)
24장에서 ‘꿀’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우리가 누리는 여러 가지 즐거움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음식도 그렇고 사람도, 영예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항상 붙어다녀서는 곤란합니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 서로 허물없이 지낸다고 하다가 한 번 척을 지면, 원수처럼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 진실, 정직, 사랑 (18-26)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18)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이러합니다.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다.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 칼, 화살 모두 살상무기입니다. 거짓증거가 그와 같습니다. 거짓증거, 거짓말은 한 사람은 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예화>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1923년 9월에 강진이 일본의 중심지 도쿄와 관동 일대를 강타했습니다. 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에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가 발생했고 도쿄 일대가 잿더미로 변하는 등 상당한 재산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뒤,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에게 학살당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사람들의 분노를 정부로 향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거짓 선동을 일으켜서, 무고한 조선인들이 수 천명이 희생을 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19)
‘환난의 날’에는 사람들이 진실하기가 어렵습니다. 6.25와 같은 전쟁 후라든지, 20년 전의 IMF 때라든지 어려운 때에는 기회주의자가 이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믿을 만한 사람, 진실한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21-22)
예수님 말씀처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원수의 마음을 녹이면, 친구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계속 상대방이 우리를 원수로 여기고 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보복하실 것입니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23-24)
이스라엘 지형을 보면, 서풍인데 오자(誤字)가 아닌가 합니다. 비슷한 말씀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 17:9)
잘못을 거듭 말하고, 고자질 하는 것은 화목, 화평하게 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특히, 가정에서, 부부사이에 잘못을 덮어주고 다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형제 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26)
* 절제의 중요성
옛날에 드론이나 무슨 비행기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적의 공격을 막는 성벽은 참 중요합니다. 적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므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성벽이 높을수록 그 나라의 위엄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나라를 회복키 위해 온 마음을 다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쌓았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의 성벽을 잘 쌓아서 악한 생각이나 사상에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절제로 쌓는 성벽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입니다. 절제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지키는 힘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시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있는 찌꺼기들을 매일매일 제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쓰시기에 아름다운 그릇이 되게 해 주옵소서. 언제나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께 충성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 세상살이가 환난 같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언제나 진실하게 하여 주옵소서. 또 마음이 상한 사람은 위로하게 하시고,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에게는 먹이고 마시우게 하셔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소망하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잘 제어하게 하셔서, 마음의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하게 합당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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