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30장] 아굴의 잠언

 


잠언 30장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으로 소개합니다. 어떤 학자는 아굴이 이방 사람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그 아버지 ‘야게’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사’인데, 뜻은 “예언” 또는 “발언”이란 의미인데, 우리 말로 “신탁” 혹은 “말씀”으로 번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니까 말씀의 아들, 아굴이지요. 그러나 야게가 실존하는 인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굴 이름의 뜻은 ‘수집자’란 의미입니다. 말씀을 수집하고  모으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 아굴은 어쩌면 솔로몬 곁에서 그의지혜의 말을 들은 신하로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굴 자신이 솔로몬의 신하였거나, 솔로몬의 곁에서 지혜의 말씀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솔로몬의 잠언이 수집될 때, 그것들을 엮었던 히스기야의 신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아굴과 르무엘이란 사람은 솔로몬의 잠언에 텃붙이는 부록으로 그들의 어록이 삽입되고, 또한 구약성경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대학자나 지도자로서 영향력이 있던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1)


 이 아굴이 이디엘과 우갈에게 가르친 내용이 잠언 30장인데, 이디엘과 우갈은 아굴의 아들들일 수도 있고, 그의 제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디엘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뜻을 갖고 있고, 우갈은 "유능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 견해로는 실제 아들이나 실존적인 제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실력 있는 자들은 이 잠언의 말씀을 깊이 새기라.’ 는 의미로 기록한 듯 보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2-3)


 이 말을 꺼내는 것은 자기비하를 통해서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의 자기 실존을 파악하라는 의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고,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말씀을 읽거나 듣는 사람에게 ‘너는 사람이 아니다. 개나 돼지 같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빠서 앞으로 하는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니까, 남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당신들이 하나님을 모르면, 그와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는 잠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4)


 답은 ‘야훼’ 혹은 ‘여호와’ 인데, 사실 우리도 정확한 하나님의 이름을 모릅니다. 과거로부터 모세를 통해서 우리가 조금 아는 것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 뿐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임의로 바람을 불게 하시고, 땅과 바다에 경계를 정하시고, 이 땅에 ‘구원자’ ,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로 주셔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가르치시고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5-6)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지으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먼저 이 말씀을 잘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자손들에게 대대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 기본적인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데, 이 말씀에 다른 수정을 가하거나, 빼 버리거나 없는 것을 첨가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큰 죄로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 전달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잘못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사람들이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7-8)


 이 아굴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잠언 1장부터 29장까지 죽 솔로몬과 지혜자들의 어록을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립니다. 그 내용은 혹여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빼거나 더하거나 왜곡시키는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지요. 우리들도 이 모범적인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에 자신의 사견(私見)을 더해서 이단과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말씀이 잘못 전해진 것이 있으면, 성도들의 기억에서 지워 주시고, 오직 주의 말씀만 새겨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돈벌이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간구합니다. 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 이런 것입니다. ‘돈을 많이 주는 집회’와 그렇지 않은 집회를 구분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집회를 가지, 별로 없는 곳에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돈이 안 되니까. 그렇다고 목회를 하면서 사례를 받지 않아서 궁핍하게 되면, 장발장처럼, 배고픔에 빵을 훔쳐서, 하나님의 성호를 더럽힐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 아굴은 자기 스스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이고, 사람은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 물질을 하나님께 구하고 구차하게 구걸을 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돈을 받고 자기 것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파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간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9)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잘 되고 부유하고 권세가 있으면, 하나님을 굳이 찾지 않습니다.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찾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좀 잘 살게 되면, 여행하고, 즐기고 먹고 마시는데 빠져서, 예배를 등한시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10절부터 아굴이 인간관계 속에서 금지할 것을 제시합니다. 먼저, 고자질, 일러 받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0)


 아랫 사람의 잘못을 상관에게 일러서, 괜히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자기를 돕는 사람, 즉 인맥을 만들기보다 앞서서 원수를 맺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에 주제넘게 관여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혹시 우리가 전후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사람의 인권을 깨뜨리는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SNS상에서 얼마나 많은 폭로와 비방이 난무합니까? 그보다 더 한심한 것은 내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누리꾼들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나서서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것 마냥, 보복한다고 나섭니다. 그런 일은 공적인 기관에게 맡기고, 그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나와 관계된 일은 협조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입니다. 


 조심하고 피해야 할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애비애미도 모르는 기본적인 인륜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큰 피해를 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합니다. 자기 부모를 폭행하는 패륜도 일삼습니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1)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거나, 자신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남 일에 참견하며, 정죄합니다. 남의 인생을 난도질하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서, 부모도 아닌 데, 간섭합니다. 이들은 잘 되면, 모든 것이 자기 때문으로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잘못되면, 책임을 지지 않고 떠나갑니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


 이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온유하게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겠지만, 자신도 혹시 비슷한 잘못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성찰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 무리라고 합니다. 꼭 오늘날 정당의 모습이 아닙니까? 권력과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그런 자들. 조심해야 합니다.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3)


 교만한 사람들도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별로 아는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아는 듯이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지혜와 지식을 가진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 자기 영혼이 어떤 지도 알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4)


 이런 자들은 자기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면, 이렇게 저렇게 이용합니다.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과 어울리면, 더 괴로움과 고난이 닥치게 됩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리 저리 끌고다니면서, 그분들을 돕는다고 후원금을 모금하지만, 결국에는 자기들을 위해서 이용하고 착취한 ‘윤미향’ 의원 같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크리스천 이라고 하는데, 정말 얼굴이 낫 뜨거워서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아 준 우리가 ‘죄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 한다고 떠벌리는 사람 조심해야 하고, 정말 바르고 정직하게 일을 하는지 우리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15-16)


 이 아굴이란 사람이 자연을 잘 관찰하면서, 거머리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거머리처럼 만족을 모르고 계속 피를 빠는 것처럼 사람의 욕심을 비유합니다. 그 욕심대로 나아가면, 그 끝은 ‘스올’ 곧 죽음입니다. 또, 산불이나 들불이 나서, 모든 것을 타 태워서 없애기 까지는 저절로 꺼지는 법이 없지요. 불의 욕망도 그러하듯이 사람의 욕심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땅은 항상 비가 부족한 곳입니다. 조금 내려도 비가 언제 왔는지 금새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을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으로 비유했습니다. 자연현상을 보면서, 우리네 욕심도 그렇다는 것이지요. 


 요즘, 결혼도 안하고 여성들이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사회적인 현상도 있지만,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는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으면,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를 받습니다. 시집을 가지 못했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면, 얼마나 미움을 받는지. 그래서, 한나가 울면서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의 그 한과 욕망도 비슷하다고 비유했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17)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이 제5계명 아닙니까? 그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서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여기 잠언을 통해서 첨언합니다. 일종의 저주문처럼, 비참한 죽음과 누구도 애도하는 이 없이, 버려져서 장례 또한 치르지 못하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아굴은 자신이 열심히 관찰하고 연구해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우리는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용기, 그리고 정직함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18-20)  


 아굴은 독수리의 움직임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 새는 맹수로 다른 새들을 잡아 먹습니다. 심지어, 땅에까지 내려와 시체를 뜯어 먹거나, 작은 생쥐같은 것들을 사냥하기도 합니다. 모든 새들보다 높이 나는 독수리에게 다른 새들은 그저 사냥감에 불과합니다. 뱀도 땅을 미끄러져 다니기 때문에 발자국이 남지 않지요. 그리고 바닷물을 지나는 배도 배가 다녔던 길이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비유를 드는 것이, 마지막에 음녀의 자취를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또, 아굴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21-23)


 권세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는 것입니다. 종과 왕은 신분의 차이가 끝에서 끝인데, 하루 아침에 뒤바뀔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별로 재능도 없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잘먹고 잘사는 것도 있어나는 일이고, 누구나 저 여인은 시집을 못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집을 잘 갑니다. 그리고 여종이 여주인이 되는 일도 벌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양지가 음지되고, 음지가 양지가 되는 변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굴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찮게 여기는 작은 미물에서도 지혜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24-28)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는 개미를 보고, 우리들도 죽음 이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우리 인생의 집을 잘 지어야 하는데, 여기 말씀에 소개되는 사반(바위 너구리)이 집을 반석에 짓습니다. 우두머리가 없어도 떼를 지어서 메뚜기는 양식을 얻으려고 나아갑니다. 그 메뚜기에게 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일까요? 또 도마뱀은 작고 징그럽고 하지만, 왕궁에 있습니다. 고대에 파리나 모기를 잡기 위해서 왕실에서 도마뱀을 길렀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작고 연약하더라도,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 우두머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준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29-31)


 우리 성도들은 사자나 사냥개나 숫염소처럼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을 이길 그 어떤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우리의 배경이 되어 주시는데, 비굴하게 세상에서 굽신거리며 살 이유가 있습니까? 언제나 저와 여러분은 당당하고 멋진 주의 자녀들로서 거룩하고 복된 아름다운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32-33)


 마지막 당부는 우리가 당당한 것과 교만한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게 행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악한 일을 하면서 당당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련하지만, 풍성함을 누리며, 배 부르게 먹고 지내온 것이 우리 선조들의 흘린 땀과 수고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손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이 땅에서 아름답고 선한 일에 힘쓰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살피시고 아십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시고 세상의 불의와 죄악 때문에 낙심하여 함께 죄 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 나라의 상급과 영광을 위해, 오늘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도 좋은 것은 배우고 받아들여서 지혜롭게 행하게 하시고, 악하고 추한 일에도 반면 교사를 삼아,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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