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1장] 어머니의 교훈

 


 “르무엘 왕이 말씀한 바 곧 그의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1-2)


  잠언의 마지막 장은 ‘르무엘 왕의 어머니의 잠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상 르무엘이란 왕은 없었습니다. ‘르무엘 왕’을 솔로몬왕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하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르무엘을 외국의 왕으로 보고 있는데, 외국에서도 그 이름을 찾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방 나라 왕의 지혜를 성경에 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 받은 바 없지만, 제 생각에는 이 르무엘이 서기관들의 실수나 의도적으로  사무엘을 르무엘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왕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왕이라 표현했고, 서원으로 낳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누가 언급이 되었느냐 하는 것보다 “이 말씀이 성경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핵심적인 가르침은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에는 지도자가 많은 여인들을 거느릴 수 있었고, 자녀를 많이 낳을 수 있습니다. 전혀 그것이 흠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권장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모를 떠나 연합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율법(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잠언의 마지막 부분, 대미를 장식하는 끝이 어머니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파격적이고 이례적(異例的)인 것입니다. 어쩌면, 고대 사회가 항상 가부장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반박할 만한 역사적 사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신앙교육과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아버지, 어머니가 따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양육해야 할 일입니다. 


 1-2절에서 ‘내 아들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내 태에서 난’ 10달 동안 뱃속에 품었던 아들이고, ‘서원대로 얻은’ 아들입니다. 그 어머니가 오랫동안 임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어미나가(한나?)  서원을 해서 하나님께 받은 아들입니다. 그 소중하고 귀한 아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니까 정말 귀한 말씀입니다. 


 그 어머니의 교훈에는 지도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교훈입니다.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 (3)


 참, 현명한 교훈입니다. 신명기의 왕의 법에도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장 지혜로웠지만, 타락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솔로몬에게는 부인과 첩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혜의 왕이라고 불렸던 그에게는 아내가 700명이고, 첩도 30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아내를 두어서 그의 힘을 쾌락과 향락에 허비했고, 결국에는 이방 공주들이 가져온 우상을 섬기는 큰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사람도 여성에게 넘어갔는데, 그보다 한참 못한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권세를 가지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빼앗는 일에 열중하면 안 됩니다. 세계의 정복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사실 존경할 일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고, 그런 지도자 밑에 있는 백성들은 얼마나 시달려야 했는지 모릅니다. 승리하면 승리에 취해서 같이 인권을 유린하고 포로로 잡은 백성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대했겠으며, 또 전쟁에서 지면, 진 대로 얼마나 많은 세금과 조공을 갖다 받치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노예로 뺏기고 재산도 뺏기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왕은 따를 것이 없고, 영원하신 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과 힘과 권세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하지 않으십니까? 그분의 희생과 사랑에 모두 무릎을 꿇고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따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야 말고 진정한 왕이십니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 (4-5)


 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나친 향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왕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잔치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왕과 포도주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습니다. 이방 나라 왕들과도 외교적으로 관계를 가질 때, 만찬이 있을 것이고, 국내적으로도 국경일에 또 연회를 베풀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나치면 실수하게 되고,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왕이 주색(酒色)에 빠져 분별력과 판단력을 상실한다면, 그 나라의 안위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왕의 해야 할 일,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8-9)


 억울한 사람, 고독한 사람, 힘없고 불의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잘 살펴서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 말씀에서 ‘말을 못하는 사람’은 벙어리가 아닙니다. 글을 몰라서, 소송을 할 줄 모르고, 배운 것이 없어서 어떻게 억울함을 풀어야 할 지 모르는 자들을 잘 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고’ 같은 제도가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법원에 가면, ‘무료법률 상담’을 해 주는 곳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 가면 어떻게 소송을 할 수 있는지 자세히 안내를 해 주고 도움을 줍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률용어가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말 못하는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왕이 사회 전반에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불의가 행해지는데, 바로잡지 못한 곳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고독한 사람’은 사회적인 약자이지요. 가난해서 누구도 돌봐주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을 찾아서 그 인생을 개척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왕을 두실 때는 이런 것을 위해 권세와 힘과 돈과 사람들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나라의 안보도 중요하지만, 내정(內政)도 중요한 왕의 역할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왕’이나 권력자는 아니지만, 그런 지도자를 선출하고 인재를 길러내는데, 관심과 힘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즐거움과 재미에 취하는 일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취미 생활, 여가 생활에 바빠도 그런 일은 성도가 빠져서 해야 할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배우자를 얻는데, 나머지 부분을 할애합니다. 즉, 르무엘은 남자지요. 이 남자에게 가장 알맞은 배우자를 찾아서 결혼하는 것이 앞날을 위한 든든한 자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시고, 홀로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해서, 짝을 붙여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명명하시길, ‘돕는 베필’이라고 했습니다. 즉, 남자 혼자서는 일을 제대로 못합니다. 자식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교육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르무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지혜의 책인 잠언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지혜도 현숙하고, 현명한 배우자를 얻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10절부터 31절까지인데,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시편 119편처럼,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알파벳 형식’ 또는 ‘답관체(踏冠體)형식’이라고 합니다. 답관체는 ‘머릿 글자를 따라가는 글’입니다.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 א(알렙)으로 시작하는 단어로 시작해서 알파벳 תּ(타브)로 끝나는 정형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쉽게 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0)


 성경에서 말하는 이 현숙한 여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숙한 여인, 신사임당같은 현모양처(賢母良妻) 같은 여성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현숙하다’의 히브리어적인 의미는 ‘능력 있다’, ‘힘이 있다’ 입니다. 그래서 ‘현숙한 여인’은 번역을 할 때, ‘능력있는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런데, 계속 읽어 가면, 단순히 능력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치면, 단순히 돈을 잘 벌거나 사회적으로 유능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11-12)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얻은 남편의 복이 있습니다. 믿을 만하고 신뢰할만 한 여성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악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편을 이용해 먹고, 속된 말로 등골 빼먹고, 필요없어지면 버리는 그런 매정한 여성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런 여성만 있을까요? 그런 남자도 많지요.


 남편이 아내를 믿고, 아내는 남편을 신뢰하는 가정은 참 복됩니다. 그런 가정은 산업이 핍절(乏絶)하지 않는다, 즉 가난하게 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부부는 자신이 하는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사치하거나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의 정절의 마음을 평생동안 지키며, 자기 배우자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혼인 계약을 지키는 선을 행합니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현숙한 여인은 근면합니다. 이 여인은 입으로만 말하거나, 손가락만 움직이며 시키지 않고, 스스로 부지런히 자기 손과 발을 움직이며 열심히 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는 지중해 해상무역을 페니키아 상인들이 주도했습니다. 이스라엘 남성들도 잘 하기 어렵고 나서지 않는 분야였는데, 그럼에도 양식을 먼 데서 갖고 온다는 것은 이들과 무역을 할 만큼 진취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고 흉년이 들기 전에 먼 곳에서라도 양식을 준비하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집 안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자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16-18)


 이 여성은 지혜롭게 재정을 운영합니다. 땅을 사고파는 일은 남자의 몫이었지만, 그런 일은 물론, 장사(사업) 수완도 뛰어나서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합니다. 당시에 옷들은 다 통으로 짠 옷이었기에 일을 하려면 허리를 묶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움직임이 편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몸을 편하게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마음을 다집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신발끈을 질끈 묶었다는 것입니다.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19-20)


 이 여성은 긍휼함이 있어서 어렵고 힘든 자를 그냥 무시하지 않고,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기 일을 열심히 하되,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여력이 있게 산업을 일으키기를 축원합니다.

 

 “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20-21)


 현숙한 여인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홍색 옷’을 입히는데, 그것은 가족들을 모두 존귀하게 만들고 보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에 눈이 올 일은 없지만, 만약에 온다고 할지라도 환난 날을 위한 대비가 잘 되어 있어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편안한 잠자리와 고귀한 신분을 갖도록 합니다.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23-25)


 고대 당시에는 이스라엘의 ‘성문’은 공적인 일을 의논하고, 재판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성문에 앉았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다는 의미로 출세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28-29)


 그리고 자녀들도 어머니에게 감사(축복)한다는 것은 그녀가 자녀들을 잘 양육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아내를 향해서 남편은 최고의 칭찬을 합니다. “현숙한 있는 여인들이 많다지만, 당신이 최고요.”라고 합니다. 


 31장의 결론이자 잠언의 마지막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30-31)


 이쁘고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들에게는 최고의 아냇감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 현숙한 아내야 말로 최고의 여성임을, 아내임을 증거합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에서 시작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도록 교훈하고 끝이 납니다. 오래전 유행가 중에 ‘희망사항’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여자…” 


 남자 가수가 노래를 부르다가, 마지막은 이 곡을 작곡했던 작곡가 여성이 마지막으로 덧붙이며 노래의 마무리합니다.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현숙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면, 동일하게 남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현숙해야 합니다. 잠언의 대부분을 솔로몬이 기록하였다고 해서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하지만, 그의 실패를 통해서 볼 때,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가 깊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솔로몬으로 시작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아니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잠언은 과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지혜의 선조들을 만나서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따를 것을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은 왕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사오니, 이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여 가슴에 새기고, 지혜롭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과 멀리해야 할 것들을 가릴 수 있게 하시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으며,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지금은 미련하고 연약하지만, 강건하고, 현명하고 현숙한 자가 되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그런 신실한 주님의 자녀, 백성되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이 복을 받게 하시고, 이 나라가 복을 받게 하옵소서! 이 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전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제자 삼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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