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6장 거리두기

 


<출처: 교회와 신앙, 언약궤>

 사람이 종교를 갖는 것의 근본적인 이유에는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평소에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던 비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의 나쁜 행실을 보고, 그 종교를 비판하곤 합니다. 이를 테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조금만 나쁜 짓을 해도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비판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위선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비난을 하고 정죄를 했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큰 병이 생기거나 죽을 위험에 노출이 되면, 하나님, 예수님을 찾습니다. 이것 또한 위선이지요. 언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광신자라고 하고, 나약한 사람들이나 요행을 바라고 믿는다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정작 자기나 자기 가족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닥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어떤 불행이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위안을 얻기 위해서 신을 믿고 섬깁니다. 본문의 3천 년 전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자기들에게 두었다가는 재앙 때문에 망하기 때문에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 보내겠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1) 

 여호와의 궤를 7달 동안 두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신이 정말 살아있는 신이고,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신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충분한 시간을 옆에서 두고 보았는데, 그들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이 섬길 신으로 회개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앙을 경험하면서도 끝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 사람들은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2)  

 블레셋 방백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그들의 결정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있던 곳,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말씀의 제목이 ‘거리두기’ 인데, 이 사람들도 하나님과 거리를 두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 속마음은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재앙도 내리지 말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간섭하지 말며,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복’을 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방해나 훼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바람입니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돌려보내면, 무슨 일이 꼭 생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가운데, 우상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들과 박수, 무당 할 것 없이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을 불러서 이방 신(이스라엘 신)을 잘 달래서(?) 돌려 보낼 방법을 간구합니다. 

 제가 젊을 때 들은 이야기지만, 기독교를 믿는 사람 가운데에도 이렇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더니, 재산 상에 손해가 납니다. 그래서 꼭 ‘십일조 만큼은 빼먹지 않고 드려야, 자기가 하는 사업이 어려움이 없더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바른 신앙관이 아닙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돈을 갖다 바치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는 그런 신으로 생각하는지.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3)

 이방 신의 신관이 대체로 이렇습니다. 그 신을 섬기지 않으면, 재앙이 오고 질병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건제(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 특별히 신의 것을 도둑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를 드리고 제물을 바쳐야 병도 낫고, 재앙이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은 점집에 가면, ‘부적’을 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복채로 거금을 요구하지요. 평상시 같으면, 돈을 내놓지 않을 사람도, 한 번 크게 병들거나 다치거나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 별수없이 다 돈을 내놓게 됩니다.

 보나마나, 이런 것으로 이방의 제사장이나 복술자들이 복채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때, 크게 한 몫을 잡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신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물어야지 왜 자기들의 제사장에게 가서 묻습니까? “와서 가져 가시오!” 해도 레위인들이나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알아서 모셔 갔을텐데,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4)

 금덩어리 10개나 바쳐야 합니다. 아마 복술자들이 큰 것 10개와 작은 것 10개를 만들어서 큰 것 10개 값을 받고, 인 마이 포켓한(빼 돌린) 다음에 작은 것 넣어서 이스라엘 지방으로 돌려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5)

 우리는 지금 이단, 사이비의 전형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면서 이득은 박수, 무당이 취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우리 목회자들도 이런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말은 맞는 말인데, 이익은 누가 취하고 있습니까? 이단 사이비도 같은 성경을 가지고 비슷한 말을 합니다. 진리와 함께 자신의 사리사욕을 적당히 섞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형식도 비슷합니다. 율법에서 ‘속건제’를 말했으니, 여기도 속건제가 나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정확히 알면, 금덩어리로 독한 종기의 모습이나 쥐의 형상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속건제는 레위기 5장 후반부에 나오는데, 성물에 대하여 범죄하였으면, 성소의 세겔로 ‘은’으로 드려야 합니다. 말씀을 읽으면 정확하게 나오는데, 왜 ‘금’을 요구했을까요? 무당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설프게 알았거나, 아니면 딴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6)

 또, 말씀을 가지고 겁박(劫迫)합니다. 이것이 이단, 사이비들이 하는 짓입니다. 성경을 가져다가 경고하고 위협합니다. 이집트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려 보내라 할 때에 보내지 않았다가 10가지 재앙을 뚜드려 맞지 않았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이 일을 속히 진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더 신중하게 판단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지요. 그들의 목적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한 몫 단단히 챙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블레셋의 방백들이 신속하게 그 일을 집행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블레셋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재앙을 당하고 있었다는 반증(反證)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 (7-9)

 이 이방 제사장들과 박수, 무당들은 다 엉터리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궤는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새 수레를 하나 만들라고 합니다. 그리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즉 암소 두 마리로 수레를 끌게 하라고 합니다. 

 멍에를 메어 본 소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기리기리 날 뛰고, 제어가 안 되는데, 소들이 잘 메고 벧세메스 길(이스라엘 방향)로 잘 가면, 이스라엘 신이 노해서 재앙을 내린 것으로 알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게 전염병이 퍼진 것으로 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확신이 없는 것이지요. 멍에 메어보지 않은 소가 멍에를 잘 메고 길을 가는 것이 확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린 것으로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얼토당토 않은 무당들의 말이지만, 이 말대로 이뤄집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린 것이 분명히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할 뿐이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어떤 피조세계를 통해서라든지,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개입하셔서, 정말 ‘신’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 우상의 제사장이나 박수, 무당들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어느 기독교 신학과 교수님이 타종교 관련 논문을 준비하면서, 유명한 점집에 들어가서 설문을 했다고 합니다. 내용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이 점집에 드나드는 지 조사를 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들의 비중이 약 15% 정도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점집에 드나드는 사람의 종교를 분석해 보니까, 역시 15% 정도 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 점쟁이가 그 신학 교수에게 “제발, 그리스도인들이 점치러 오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얼굴이 뜨듯하고 부끄러웠든지, 낯을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0-12) 

 블레셋 사람들이 점쟁이들 말대로 행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점쟁이 말 잘 듣습니다. 아주 순종을 잘 합니다. 그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믿는 사람들만 불순종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점쟁이 말대로 하면서, 소들을 따라가면서 정말, 여호와 신이 자신들에게 재앙을 내렸는지 확인합니다. 아주 철저하지요. 그런데,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해 놓고, 정말 하나님이 이루신 것인가 살펴 보지도 않습니다. 잘 살펴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물을 드리고 해야 하는데, 자기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또 다시 무슨 일이 터질 때까지 기도하지 않지요. 

 우리가 불신자들의 모습이라도 좋은 것은 배워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정말 점쟁이 말대로 이뤄지는지 잘 살펴 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대로 되는 지 잘 살펴 보고 관찰해야 하는데,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살기에 바쁜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서도 자기가 무슨 기도를 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께도 도와 주셔서, 은혜를 입었으면, 주위에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 때문에 기도했다가 일이 잘 되면, 그것으로 자기 만족하고 끝내 버립니다. 이런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들을 우리 주위에 자꾸 전하면, 그것이 전도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기사들, 내게 베푸신 은혜들을 잊지 말고, 증언하고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3-15)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율법을 아는 레위인들이 급하게 여호수아 밭의 큰 돌 앞에서 제사를 준비해서 드립니다.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아마 ‘속죄제’, ‘속건제’를 드린 것 같습니다. 벧세메스에도 ‘여호수아’ 라는 이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신약으로 보면, “예수”, 여호와의는 구원하신다는 뜻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큰 돌은 반석(게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떠올리게 함)을 상징하지요. 마치 예배당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곳으로 하나님의 영이 오십니다.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6-18)

 여호수아의 큰 돌 앞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모든 블레셋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제사가 드려집니다. 즉, 모든 이방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이렇게 해서 블레셋에 내린 하나님의 재앙은 그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실 우리는 원수관계였는데,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고, 더 이상 재앙과 환난에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은 거의가 다 이렇게 신약의 그림자이고 우리들에게 예표가 됩니다. 사실, 많은 이방 나라와 백성들, 우리를 포함해서 자기들 방식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제사하며 섬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해서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구원의 과정과 역사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이방과 나라와 민족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오셨기 때문에 유대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이 6장의 마지막 부분은 참 어이없게도 끝납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하나님 앞에 부정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모세 5경에 따르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와 십계명의 두 돌판이 있다고 했는데, 그냥 듣고 믿고, 함부로 법궤를 손대려고 하면 안 되었는데, 그만 보고자 하는 호기심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19)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면, 그 죄로 말미암아 죽습니다. 여기 괄호 안에 ‘오만’ 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숫자 같습니다. 그래서 벧세메스 사람들도 하나님의 궤를 만지려고 열어보려고 하다가 70명이나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면 죽습니다. 우리 신약의 성도들도 지금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좋아하고 기뻐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교만하게 행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이를 때까지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20-21)

 원래 ‘실로’에 있었던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 사람들 때문에 벧세메스로 오게 되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기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곳에서 매번 번제를 드리고 다른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죄와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기는 커녕,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재앙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기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법궤를 옮겨가게 합니다. 우리들도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말씀대로 잘 믿고 섬기면 복을 받지만, 자기들이 범죄하고 하나님께 재앙을 받자 하나님을 가까이 섬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곁에서 섬길 수 있음에도 그것을 포기하고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참 신은 아버지 뿐인데, 블레셋 사람들처럼, 이 세상도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다. 저희들도 혹시 그렇게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몰래, 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살고 싶은 욕망이 저희들에게도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안에 우리가 있게 하시고, 우리 안에 아버지가 계시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고, 아버지의 기쁨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나라를 기뻐하며,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모든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를 불러 주셨으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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