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1장 신임을 얻은 사울

 

< 출처: 연세중앙교회 인터넷 신문 >

 10장에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셔습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느냐 하면서, 왕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능력을 아직 검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왕으로서 나라를 지켜내고, 백성들의 삶이 평화롭도록 다스릴 수 있는 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에 맞서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하니” (1)

 길르앗 야베스는 요단 강 동편 땅입니다. 요단 강 동쪽 므낫세 반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인데(민 32:39-40), ‘야베스 길르앗’ 또는 ‘야베스’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암몬 왕 나하스가 이곳을 점령하려고 군대를 몰고 왔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전쟁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항복하고 암몬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조공을 바치고 살겠다고 것이지요. 

 야베스 사람들이 사사시대, 정확하게 몇 년 전인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 10지파가 베냐민과 전쟁을 할 때,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몰살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삿 21:8-12). 그 때 주민의 대부분은 죽었고 처녀 400명은 사로잡혀서 지파가 끊어질 위기에 있던 베냐민 남자에게 주어졌습니다(삿 21:14). 그래서, 이스라엘 편에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공교롭게 길르앗 야베스가 위기에 처합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그래도 베냐민 지파와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혈연 관계로 보아도 무방하지요. 나하스에게 야베스 땅이 빼앗기고 그곳 사람들은 멸절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2)

 나하스가 언약을 맺지 않겠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길르앗 야베스를 시작으로 온 이스라엘 영토를 빼앗고, 그 백성들을 유린(蹂躪)하겠다고 합니다. 나하스가 아주 교만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길르앗 야베스는 물론이요,  온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고 유세를 부립니다.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3)

 야베스의 지도자들이 암몬과 싸울만한 이스라엘 군대가 있는지, 한 번 원군을 요청해 볼 테니까 7일간 만 여유를 달라고 합니다. 그 뒤에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요. 나하스가 교만해서, 기다려 줍니다. 원래 전쟁은 기습이고 졸전이라도 빨리 끝내야 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면, 정말 자기가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이런 헛된 망상과 같은 것도 어쩌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계략이 나온지도 모릅니다. 사울에게 공적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지요.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4-5)

 암몬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 곧 야베스를 시작으로 전쟁이 시작될 것이란 소식들이 펴저 나가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절망하고 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웠는데, 왕에게 나아가서 ‘전쟁을 준비하고 대비하라’고 하기보다 이렇게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럴거면, 왜 왕을 세웠습니까? 이런 모습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이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대비책이 없습니다. 왕이라고 하는 사람이 부름은 받았지만, 그냥 자기 밭에서 농사나 짓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6-7)

 성령의 감동이 꼭 사람이 부드럽고 유(柔)하게만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드러납니다. 평상시 같으면 전혀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을 텐데, 하나님의 백성을 유린하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납니다. 사울이 평상시에는 점잖은 사람인데, 그 분노를 못 이겨서, 자기가 몰던 소 2마리를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12조각을 내서 각 지파에게 보내지요.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렇게 찢어버리고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자기 집에서 키우고, 길러서 밭을 갈게 했던 소들이 아닙니까? 왜 아끼는 마음이 없겠어요? 그런데, 자기 본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분노가 임한 것입니다. 이 만큼 분노가 있어야, 창을 잡고 칼을 잡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얼마 전에 베냐민 지파가 몰살을 당했던 기억이 떠오르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8)

 이스라엘에 엄청난 군대가 모집이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대단한 일입니다. 사울이 아직 왕으로서 무슨 권위도 없어 보였는데, 모병을 하니까 33만 명이나 모였습니다.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9)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야베스의 전령들에게 ‘내일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즘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선포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사울이 하는 말이지만, 그가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울이 싸워보지도 않고, 암몬 군대가 얼마나 되는 지 알고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겠습니까?

 이런 것이 정말,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나하스의 교만과 어떻게 보면 사울이 꽤 교만해 보일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도 앞으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얼마나 담대하게 나갑니까? 곰, 사자 같은 맹수도 때려 잡고 양을 건졌는데,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저 할례받지 않은 골리앗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나가서 싸웁니다. 우리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해서 용기와 사기가 충만한 것이지, 아니면 나하스처럼 교만해서, 오만과 교만으로 겁도 없이 나서는 것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0)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말을 믿고, 담대하게 암몬에게 한 판 붙자고 합니다. 요단 강을 사이에 두고 동편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 이렇게 두 지파 반이 있고, 요단 서편에 9지파 반이 있는데, 사실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까 서로 왕래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도 영남과 호남지역이 강을 두고 갈라져 있으니까 생각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런 때, 암몬과의 전쟁으로 사울 왕이 요단 서편과 동편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을 모아서 하나가 되게 만드는 ‘민족 통합’의 계기가 됩니다.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1)

 전쟁은 싱겁게 끝납니다. 사울이 베섹에서 큰 군대를 3대로 나눠서 급습을 합니다. 베섹에서 야베스까지 약 30km가 넘는 거리인데, 급하게 군대를 모아서, 한 주간 만에 무슨 훈련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먼 곳을 이동하는데, 새벽에 급습한 것을 보면, 밤 새도록 이동해서 싸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큰 승리를 합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야베스를 구원하고, 군대를 통솔하는 사울의 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사울은 이때부터 정말 왕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지요.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2-13)

 여기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아마 이 암몬과의 전쟁에 사무엘도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능력(?)을 본 사람들이 전에 사울에게 기름부을 때, 왕을 모독하고 비난했던 자들을 찾아서 심판하자고 합니다. 이 때 적극적으로 사울이 나서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셨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며 용서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인품과 실력과 겸손을 보고 백성들도 사울이 정말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인정을 합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 (14-15)

 지난 번에는 하나님 편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 나라를 새롭게 하자’ 할 때는 백성 편에서 사울을 정식으로 왕으로 받아들이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제시했지만 백성들은 ‘글쎄~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 구원자가 될까?’ 하며, 우려와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몬전쟁으로 사울이 전쟁을 하는 것을 보더니, 백성들이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사울을 왕으로 영접하고 나라를 세우자는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만약, 암몬을 치러 나가지 않았으면 사울이 불신임을 받았을 텐데, 오히려 이 사건으로 야베스를 구원함으로, 사울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왕이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울 후에 다윗도 보면,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골리앗을 죽이는 그런 능력과 담력을 봤기 때문에 백성들이 왕으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까? 사울도 그 때는 죽었고. 옛날에는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경력이나 어떤 이력서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실력을 발휘해서 인정받는 그런 과정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살다가 무슨 일이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이 나를 망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일을 극복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담력이 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시험을 주시거든, 더 하나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키우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집사의 일’을 잘 감당한 사람은 믿음의 큰 담력을 얻게 된다(딤전 3:13)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사울왕 때나 다윗 같은 사람들이 어떤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만한 업적을 쌓게 되는데 사울에게 있어서는 그가 왕으로 정말 백성에게 신임을 얻게 되는 게 암몬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국민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삶 속에 이런저런 문제가 일어날 때 이 문제가 나를 망하게 하려고 왔다고 믿지 말고 이걸 내가 극복함으로써 내 신앙과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장할 것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도전을 해야 돼요. 이 기독교 역사는 항상 이렇게 도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는 거예요. 문제를 보고 피하는 사람은 승리하지 못해요.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를 정면으로 맞이해가지고 돌파하고 나가야 믿음이 자라지 피하는 사람들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문제가 있으면 길이 있다. 답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안 되는 길만 자꾸 봐요. 안 되는 길은요 무한대로 있습니다. 안 되는 길은 천 가지도 있고 만 가지도 있고 끝없이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안 되는 길이 100가지가 있어도 되는 길 1가지만 있으면 된다 하는 믿음이 필요해요. 그래서 안 된다고 자꾸 낙심하거나 돌아서거나 피하거나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무슨 길이 있느냐. 그래서 그런 걸 가지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도움을 구하고 그래서 하나님 뜻이면 이루어져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서를 배우는 것은 바로 앞서 가신 분들이 남긴 갚진 교훈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남긴 교훈을 우리 것으로 할 때 우리가 발전합니다. 언제나 발전이라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끝없이 도전하고 모험을 무릅쓰고 프론티어 정신을 가지고 나아간 사람들에 의해서 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그저 안일하게 자꾸 주저앉고 뒷걸음치고 피하고 하는 사람은 위험이나 모험은 없을지라도 발전은 없습니다. 그래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이 없으면 사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공부하면서, 끝없이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때마다 잘 살펴서 우리 앞선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우리가 잘 살펴보고 잘못된 것은 우리의 반면 교사로 삼고 그분들이 잘한 것은 우리가 모델로 삼아서 우리들도 믿음의 길로, 담대한 길로 걸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통해서 세움을 받은 사울이 처음에는 사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지만 암몬 사람들의 침략을 잘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께나 또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게 되고 이스라엘 왕으로 바로 서는 역사를 보았습니다. 

 우리도 우리 앞에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서 피하지 않고 그 문제를 잘 해결함으로써 우리 믿음의 담력이 더 크게 도와 주시고, 항상 개척정신과 도전하는 정신을 가지며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 쓰기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