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믹마스, 출처: 연세중앙교회 인터넷 신문 >
12장에서 사무엘이 길갈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왕의 즉위식과 자신의 퇴임식을 하면서, 고별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더 흐릅니다. 이제 사울 왕이 왕으로서 대접을 받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1)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개역개정 성경이 번역을 잘못했습니다. 정확하게 사울이 40살에 왕이 되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정확한 나이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는 학자들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서 새로 이스라엘 왕의 통치 기간을 계산해서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은 마흔두 해였다.” (새번역, 삼상 13:1)
영어 NIV 성경에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사울에게 또 위기가 찾아옵니다. 블레셋 나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사 삼손 때부터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고, 블레셋을 이스라엘이 섬기기도 했지만,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졌으니, 주변 나라들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사울이 블레셋을 침범한 것이 아니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합니다. 왜 그럼, 요나단이 수비대를 공격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아쉽지만, 짧은 구절이나마 실마리를 찾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2)
사울이 자기 휘하에 군사 3천 명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2천 명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1천 명은 아들 요나단이 이끌도록 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의 맏아들이었고, 그 가문이 그렇듯이 무예가 있고, 군대를 통솔할 만한 리더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전적이고 용맹한 요나단은 자기 휘하에 1천 명의 군인들이 있으니까, 무언가 장수로서 업적을 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암몬과 전쟁을 해서 이겼는데, 그 다음은 자신은 그동안 자주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에게 한 번 매운 맛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3)
싸움을 건 것은 요나단이었고, 이에 블레셋도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준비하니까, 사울도 3천 명으로 블레셋과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더 많은 군대를 모으기 위해서 나팔을 불고, 이스라엘 군사들을 소집합니다.
사울이 서른 살이나 마흔이 되어도, 요나단은 더 어리지 않겠습니까? 많이 봐야 20대 청년인데, 사울도 요나단도 아직 나라를 이끌기에는 경륜이 부족합니다. 교회도 목회자나 장로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마흔 살도 되어도 경륜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이나 노인들이나 어른들에게 꼭 상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울이 요나단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삼은 것도 잘못한 것입니다. 말단부터 밟아 올라가는 것이 옳기도 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쫄병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이 천부장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여단장부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젊은 혈기에 요나단이 사고를 칩니다. 블레셋이 먼저 공격을 해 와서 싸운 것이 아니라 요나단이 먼저 공격을 했으니, 사실 전쟁의 명분은 블레셋에게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4)
자, 요나단이 블레셋을 쳤는데, 소문은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을 사울이 군대의 장으로 임명했으니까, 요나단이 한 것은 사울이 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요나단이 일을 벌여서, 이제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나게 생겼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번에 암몬과 전쟁을 했던 것처럼, 모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군대를 보니까 어마어마 하게 모인 것입니다. 아마, 첩보를 보내서 블레셋 군대의 규모와 전쟁 준비 사항을 알아 보게 시켰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5)
보통 전쟁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이쯤되면, 완전히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사울과 요나단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을 완전히 짖밟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병거, 오늘날로 치면, 전차, 장갑차를 3만 대나 준비했고, 말 타는 기마병이 6천 명입니다. 그냥 일반 보병은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6-7)
상대 군사와 무기들이 가득한 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서 숨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러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전쟁을 포기하고 요단 강 건너서 동편 땅으로 도망하고 길르앗 땅까지 이릅니다. 이 때 사울은 길갈에서 군사들을 모으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한 원래 군사로 모집되었던 3천 명은 이 전쟁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많은 고민과 회의와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이 전쟁을 위해서 사무엘을 모셔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는 결론이 났습니다. 지난 암몬과의 전쟁에서 사무엘이 함께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무엘을 기다리는데, 적은 점점 다가오는데, 사무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오기로 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마 일 주일 뒤에 보자는 연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울이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 것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화목제물을 취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8-10)
사울 왕이 제사장처럼, 번제를 집도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사울은 레위인도 아니요, 제사장은 더 아닌데, 지금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제사를 집례한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기면 어떻합니까? 둘째, 이 제사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떠나가니까, 자기와 함께 있게 하려고 지금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직 제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인데,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것은 사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배를 그런 식으로 드리면 옳지 못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고, 목회를 성공하기 위해서 드린다면 그것 역시 사울과 비슷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순수해야 합니다. 한 두 사람이 드리는 예배와 수 천 명이 드리는 예배가 사실 그 목적은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그것은 하나의 ‘쇼’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더 많은 헌금을 걷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순수해야 합니다. 지금 누구때문에 이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까? 요나단이지만, 성경은 사울이 블레셋을 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왕이나 권력자의 책임이 무겁고 막중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1-12)
사무엘이 사울이 제사를 집례하는 것을 보고, “이 뭐하는 짓입니까?” 책망하듯 물으니까, 사울이 변명을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명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사울이 보입니다. 우선, 환경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백성이 흩어지니까, 이 전쟁을 앞두고 제사로 우리가 한 마음이 되어서 모여서 잘 싸우기 위해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제사를 드린 데에는 사무엘이 늦게 온 이유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상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의 잘못을 남탓하고 상대방에게 전가시키지 않습니까? 사울도 그렇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제사를 자신의 신앙으로 포장합니다.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이 곧 임박했는데, 제사를 드리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어떤 일을 행할 때, 변명을 신앙 때문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의 책임으로 하나님께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고는 자기 아들이 치고, 책임은 하나님께 몰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변명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면, ‘부득이하여’ 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안 써야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뭘 모르면, 가만히 책망을 듣고, ‘잘못했습니다.’ 하고 반성하면 좋을 것을, 늘 우리는 이렇게 실수를 하고 잘못을 범하고 죄를 짓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3-14)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라고 번역한 것은 좀 지나치게 과장된 것 같고 원어에는 ‘어리석게 행동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어리석게 행한 것은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왕이라도 최고 권위와 명령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고 사울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우리들도 동일한 시험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나 환란에 닥쳐 올 때,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내가 자기 스스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왕이시고 자기는 그분의 뜻에 따르는 종이라고 스스로 겸손히 기다렸으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오랫동안 보존하시고 지켜 주실 텐데, 이제는 사울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 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 쳤더니, 노략꾼들이 세 대로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을 따라서 수알 땅에 이르렀고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쪽으로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는 지역 길로 향하였더라.” (15-18)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600명의 군사들과 함께 블레셋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처음에 얼마나 군사들이 모집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정규병력이 3천 명은 있었는데, 최소한 2400명, 4/5는 전쟁에서 질 것 같으니까 지레 겁을 먹고 사울 왕과 요나단 곁을 떠난 것입니다. 반면, 블레셋은 사기 충천하여 부대를 3개로 나눠서 이스라엘 여러 곳을 동시에 점령하려고 진군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 (19)
철을 가지고 칼이나 창을 만드는 사람들은 본래 헷 족속입니다. 제일 먼저 히타이트족이 철을 가지고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철기 문명을 이루려면, 풀무를 더 뜨거운 온도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기술이 있던 것입니다. 그 기술이 블레셋 민족에게는 전수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그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일급 보안 기술이지요. 여전히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방위산업 기술이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립니다. 아무나 접근해서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옛날에는 철을 다루는 기술이었지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 뜨거운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20-22)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는 해도, 농사에 필요한 기구나 도구를 대여해 주고, 돈을 받기는 하지만, 화살이나, 창, 칼과 같은 무기를 만드는 기술이나 물건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빌려 주거나 팔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찌저찌해서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는 철로 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에 언급된 모습은 꼭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영적 전쟁에 무기와 싸우는 분은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실, 전쟁을 치르고 다 이기신 주님만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야 노략을 할 뿐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 (23)
점점, 결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울의 잘못을 보면서, 우리도 여전히 주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떨며, 인간적인 계산을 가지고 마음대로 행동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외적으로 보여지는 문제가 우리의 진정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영적 전투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잘못된 태도와 고집과 교만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울의 말과 행동처럼, 부득이하여 행했다는 변명과 자기 정당화에 힘쓰기 보다, 겸손히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회개하는 삶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모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어떤 시험과 환란 가운데서, 우리를 지키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을 의뢰하게 하시고, 굳건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배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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