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1-2)
7장은 첫 구절부터 우리를 아리송하게 만듭니다. ‘기름’과 ‘이름’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요? 또, 출생과 죽음을 비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름’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올리브 기름 같은 것은 열매로부터 나옵니다. 만약 다른 고깃덩어리에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면, 맛있는 고기를 상징하는 음식이겠지요.
한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관심을 가지고 기쁨으로 축하합니다. 사람난 기쁨은 이루말할 수가 없지요. 잔치를 벌리고, 모두가 축하하면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초상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분은 이제 다시는 땅에서 만날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 우울한 분위기로, 서로 위로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는 잔칫집에 가는 것을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전도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고 봅니까? 2절 끝부분에서 그 이유가 나옵니다. 조문객으로 초상집에 갈 때, 한 사람의 죽음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잔칫집에는 맛있는 음식(고기와 기름)을 먹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초상집에는 고인(故人)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자기도 죽음을 맞이할 때, 사람들이 평가는 어떠한지, 더 중요한 창조주 앞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3-4)
계속해서 초상집과 잔칫집에서 우리가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고인을 추모하면서, 슬프지만, 그 슬픔 뒤에 오는 위로와 우리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유익이 있기 때문에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픈 것보다는 웃고 즐거운 것이 좋지요. 그래서, 결혼식이나 돌잔치나 기쁘고 축하하는 곳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우리의 죽음을 잊고 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의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5-6)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싫은 것이 있다면, 책망입니다. 남에게나 부모나 친구에게조차 책망은 기분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책망을 받아서 마땅하다면, 잘 새겨 들어야 합니다. 여기 지혜로운 사람으로 소개가 되었는데,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은 잘 하지만, 말씀의 책망은 외면하기 쉽습니다. 웃고 떠드는 소리는 그저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처럼, 그냥 여기 저기서 탁! 탁! 거리다가 끝이 납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캠핑을 가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저 불을 보면서, 정신적인 쉼을 누린다고 하지요. 일명, ‘불멍 때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머릿 속이 하도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그저,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는 헛되다고 말합니다.
7절부터는 상황이 안 좋은 때를 계속 묘사합니다. 사람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첫째는 탐욕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않았지만, 나름 잘 살고, 그럭저럭 문제없이 살다가 인생의 위기를 만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다른 외부적인 요인에서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온 내적인 것이라면, 가장 큰 원인이 아마도 ‘탐욕’일 것입니다.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7)
작은 욕심들이 계속 자랍니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을 부리면 탐욕이 됩니다. 작은 소원이야 금방 이뤄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누릴 수 있지요. 그러나 내게 맞지 않는 것을 얻으려고 하면, 바른 길로 가기보다는 다른 길을 찾게 됩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8-9)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어떠한 일이든지 시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잘 마무리를 짓는 것은 어렵습니다. 최종적으로 결과를 이루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또 다른 이들의 지원이나 도움이 필요하고,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을 하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업이나 일을 진행하다가 중간에 막히면, 우리는 쉽게 분노합니다. 그 원인이 대게 다른 이들에게 있다는 식으로, 우리는 자신보다 다른 이들에게 분노하거나 ‘화’를 내기도 합니다. ‘분노’하기 이전에 일의 절차 상에 문제가 없었는지 돌아보면서,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찍 포기하고 되돌아 가야 할지 판단해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합니다. 문제가 없었습니까? 앞에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이집트의 군대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 노예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하려느냐!’ 하면서 분노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환경과 여건이 불가능할 것으로 속단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께서 광야에 길을 내십니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10)
모세를 원망했던 이들이, 홍해를 건너고 계속해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계속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에서 살았던 때가 좋았다! 그곳에는 먹을 것도 많고, 풍부한 물이 있어서 곡식과 포도주가 나지 않았냐!”
과거,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로 살던 때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결국은 이들이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 속에서 하루하루를 낭비할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11)
이 지혜의 말씀은 죽은 사람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햇빛을 보는 자’, 곧 살아있는 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2-13)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돈’이 참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돈의 그늘’보다 더 뛰어난 것이 ‘지혜’라고 합니다. 이 지혜가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을 살린다고 합니다. 구약에서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겠지만,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인생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정죄입니다. 이렇게 굽게 하셨지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4)
사람은 어느 누구도 형통만 할 수 없고, 곤고한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상황이 언제나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의 주인으로서 이 모든 것을 병행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5)
창세기에 가장 처음으로 형제에게 살해 당해서 죽은 ‘아벨’을 떠올려 보세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그의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의를 주고, ‘죄’에게 넘어지지 말라고 하셨어도, 자신의 분노대로 동생을 살해합니다.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준비합니다. 하나님도 그 살인을 막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얼마만큼 큰 죄악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때때로 그것은 하나님도 막을 수 없는 범죄를 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죄인들을 책망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도 주셨기 때문에 죄악이 벌어지는 현장을 막지 못하셨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6-17)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극단으로 치우치고,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불행한 상황을 자초(自招)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의인이 되고, 지혜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과 생각을 너무 믿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18)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의 생각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급하게 판단하고 오해하고, 분노하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인지 겸손하게 구하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19)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나 사람보다도 크시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판단을 유보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20)
여기에서 ‘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입니다. 절대적인 선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의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21-22)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이 하는 소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로는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 보내야 합니다. 특히 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말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실수 하지 않습니까? 어떤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인데, 나도 남을 비난하고 험담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넘어가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마음에 두면, 나도 비난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악한 일을 계획하며 실행하게 되어 죄를 짓게 됩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23-24)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며, 조금 안다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해 보아야 서로 반목하고 다투고 싸움을 일으킬 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지혜자가 되기보다는 지혜자이신 주님께 먼저 아뢰고,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자에게서 지혜가 나옵니다. 모든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지혜로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혜자가 되어서,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론을 짓는 것 자체가 벌써 교만입니다. 언제나 내 생각을 주장하고 앞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설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연구하여 악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얼마나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마음은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은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더 쓰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내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여인을 피하려니와 죄인은 그 여인에게 붙잡히리로다.” (25-26)
전도자가 지혜와 명철을 얻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악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깨달았습니다. 악한 것을 미친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면, 악한 일을 손으로 행하고 그 대가를 치루는데, 사망과 음부에 빠져가는 것입니다. 여기 여인은 ‘음녀’로서 잠언에 등장하는 ‘사탄’과 같은 존재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보라 내가 낱낱이 살펴 그 이치를 연구하여 이것을 깨달았노라.” (27)
단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는데,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 혼자였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28)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29)
동양사상으로 말하면, ‘성악설’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바르지 못한 생각과 행동을 한 것입니다. 즉,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벗어난 생각과 행동을 사람이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굴복하고 순종할 때에야 비로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아무도 그 죄의 대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구약성경을 통해 볼 때,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 그리고 선지자 엘리야 정도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들도, 지나치게 자신을 믿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신뢰하지 말고, 언제나 최종적인 권위는 하나님께, 우리 예수님께 맡기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하고 용서하며, 관용하는 신실한 성도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언제나 우리는 세상의 즐거움과 연락에 빠져 살기를 원하지만, 때때로 우리 곁에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통해 말씀하시는 교훈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분노하고 탐욕을 부리며, 관용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우리의 한 뼘되는 짧은 인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죄 가운데서 멸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옵소서! 곤고하고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는 주님 나라를 위해 일하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땅의 것에 연연하여서, 아버지의 나라와 주님의 통치하심을 망각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잠시 잠깐 이 땅에서 사는 인생,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거룩한 성도로서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잘 될 때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려운 환란 속에서도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고 사랑하며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복된 삶을 살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의 구주되시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