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1-2) 전도서는 결국 ‘지혜자’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이 일생을 살면서, 누가 주인인지 알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여기 1절에 나오는 ‘지혜자’는 메시야를 가르키고, 다윗의 후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왕’입니다. 그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분입니다. 물론 전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의 후손인 인간 왕의 명령을 잘 따르고 순종하게 하려고 이 전도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에 이 전도서가 들어온 것은 단지 이스라엘 한 나라의 국한 된 왕을 잘 따르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러했다면, 그저 전도서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나 읽혀져야 할 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의 약속으로 가득찹니다. 이 전도서도 정말 온 세상을 다스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이 지혜를 가지고 통치할 것을 내비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많은 국가들이 민주사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외치면서, 아주 자유함을 가지고 잘 사는 듯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로서 대부분의 인생들은 돈을 가진 사람들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돈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돈이 좀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들을 괄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고, 또 돈을 많이 소유하고 있어도 그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계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2절 ‘왕을 가리켜 맹세했다.’는 것은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했던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백성들을 위해 ‘사사’를 세워 통치할 때, 그 하나님을 대신해서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우는 것을 하나님과 언약을 하면서 맹세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이 범죄하면, 그 죄의 댓가를 백성들이 받습니다. 오늘날에도 민주주의 사회라고 해서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이나 지방자치단체장들을 뽑을 때, 우리가 세웠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우리가 지불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성도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 죄의 짐을 좀 덜어주시고 감면해 주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도 투표를 했지만, 솔직히 뽑을 만한 사람이나 인물이 있습니까? 정말 신실하다고 하는 신앙인라는 사람도 정치판에 가면 사람이 이상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땅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의 손아귀에서 많이 놀아나고, 사람들의 욕심과 죄성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질수록 다시 오실 주님을 간절히 바라게 될 것입니다. 곧 그렇게 됩니다. 어떤 누구를 세워도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잘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사실 별로 의롭지 못하고 악했음을 하나님 앞에 이실직고 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땅에서 공평과 정의가 행해지면, 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심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4-5) 이 땅의 권력자에게도 막말을 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나 예수님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악한 일을 하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마음을 순전하게 해서, 고통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십니다. 그 때, 옆에서 지켜 보던 제 3자가 ‘왜 한 사람은 악한 짓만 골라서 하다가 망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게 하고, 또 한 사람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을 하셔도 왜 그 사람은 구원하시느냐고 반문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한 개인이나 민족이나 나라도 망하게 할 수도 있고 명예를 높여 세울 수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기가 만든 물건을 잘 간수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숴서 버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누가 왜 버리느냐고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 마음대로 하는데… 우리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낮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버릴 수도 있고, 또 원하시면, 고쳐서 쓰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탓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간구하고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서 언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환경 속에서 감사하며 기뻐할 것 뿐입니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5-6) 인간 세상에도 지도자를 잘 따르고 해야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고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이 세상의 주권자와 다시 오실 메시야의 명령에는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같은 명령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 땅에서는 환난을 당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므로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cf.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전도서 8장 5절 말씀에 ‘불행’과 요한복음의 ‘환난’이 서로 매칭이 되지 않지만,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불행이라면, 우리 성도들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승리자입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7-8)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도 아시지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미래를 대비할 때,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애쓰고 주장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잘못된 정보와 악한 사람들의 꾀임에 노출되어 있기에, 늘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이 전혀 잘못된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무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면 안 되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 주님께 여쭙고 물어보는 것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건지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이나 뜻대로 행하기 전에 주님께 아뢰면,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악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9-10) ‘사람이 사람을 주장한다’는 말은 한 사람은 권력자를 말하는 것이고 고통받는 사람은 그 밑에서 부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지나치게 권력을 쓰는 사람은 대게 악한 사람입니다. 권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권력이 오용되고 남용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가 더 악한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더 악한 사람들이 그 악한 사람들의 결과를 가져왔으면서도,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고 똑같이 그렇게 행하다가 결국에는 망합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답습하는 악한 자들이 계속 나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악한 사람들은 지혜가 없을까요? 자기가 했던 죄악대로 자신들이 당하는 것을 보면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11) 그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이 금방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니까, 하나님께서 3~4대까지 인내하시고 참으신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화 낼 것도 아닌데, 금방 화 내고 또 금방 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지간해서는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으로 치면, 한 100년은 두고보십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평생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12-13) 끝에가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 공동체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그야말로 땅에서도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최선이지요. 그러나 죄인과 악인이 섞여 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도 잘 되지 못하고 장수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100년 고생한다고 해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영원이라는 시간동안 모든 것을 보상받고,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억울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날은 그림자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예화) 춘천 강간살인 조작사건 1972년 9월 말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의 딸이 모양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근처 만화가게로 텔레비전을 보러 갔는데, 그것이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춘천시 우두동의 한 논둑길에서 나체 상태의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성폭행을 당한 후 사망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혈흔과 음모도 찾아냈지만 당시엔 유전자 검사가 없어서 누가 했는지 불분명했습니다. 파출소장 딸의 죽음이라,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사건을 보고받고 '어떤 놈이 경찰 가족을 건드렸다.'고 크게 노해서,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던 이 사건을 포함한 3대 미해결 사건에 대해 "10일 안에 범인을 잡아라. 못 잡으면 인사조치다." 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시한 안에 10월에 경찰은 이 사건의 범인을 체포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이 범인이라고 발표한 사람은 사건 현장 인근에서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정원섭 씨였습니다.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정씨는 평소 소녀들을 성추행하고 심지어 만화가게 여종업원들을 성폭행하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사건 당일 아이가 자신의 만화가게에 오자 자신의 가게에선 TV가 잘 안 나오니 이웃 만화가게로 가서 TV를 보자고 꾀어내 논둑길로 유인해 그곳에서 강간한 후 범행이 들킬까 봐 두려워 살해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검찰도 경찰의 수사가 정당하다고 인정한 후 정씨를 기소했고 현장에 정씨 아들의 연필이 있었으며 증인들의 증언도 일치한 데다 정씨 본인도 사건을 자백했다고 합니다. 1973년 3월 춘천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정씨에게 무기징역이 선고했습니다. 정씨가 항소했지만,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도 정씨의 항소 및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습니다. 정씨는 감옥에서 모범수로 복역해 특별 사면으로 15년형으로 감형되어 1987년 12월에 15년을 복역한 후 풀려났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의 재심 권고로 재심이 다시 이루어졌고, 2008년 11월 춘천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증거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거나 믿을 수 없으므로 정씨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이 항소해 서울고법에서 2심이 열렸고 2009년 2월 6일에 거기서도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이후 검찰이 다시 상고해 대법원까지 판결이 넘어가게 되었는데, 공판 날짜도 잡지 않고 2년이 넘게 사건 판결을 미루다가 마침내 2011년 10월 27일 2심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해, 정씨는 39년 동안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14-15) 이 14절 말씀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 하면서 타락하지요. 어떤 세상 노래에는 ‘세상은 요지경이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착하고 선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하니까, 이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불의한 일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그저 세상살이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약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그리고 빌립보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냥 세상을 쳐다보지 말고, 관심을 끄고 그냥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있는 소망을 바라면서, 즐거워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표현으로는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기뻐하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전도서의 말씀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어떻게 불의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냥 세상과는 담쌓고 말씀만 읽고, 예배만 드리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수고하는 일 중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여리고에 방문하셨는데, 삭개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돌무화과 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보려고 했던 삭개오는 나무 위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며 자기 집으로 모셨지요. 예수님은 소외되고,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삭개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시며,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의 갈급함을 채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된 일을 하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에게 매인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억울하게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청하여 참 자유를 누리게 하면서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세상적인 일을 하며, 그 돈을 가지고 삶의 재미를 찾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픔도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며,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를 통하여 항상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기 원합니다. 어머니가 임신하여 출산할 때까지는 걱정도 있고, 우려도 있고 심지어 해산의 고통도 있지만, 새 생명을 낳은 기쁨으로 인해서 그 모든 아픔을 잊고 기뻐하지 않습니까? 생명난 기쁨, 사람 난 기쁨으로 과거의 고통과 아픔은 다 잊어버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기쁨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16)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밤잠을 못자고 자기 문제, 세상에서 행해지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빚문제 때문에 밤잠을 못자고 하다가,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너무 세상에서 자신이 필요없는 존재인 것만 같아서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도 쾌락에 탐닉해서 마약중독 같은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깊은 잠을 자고, 잘 쉬고 오신 분들은 참 복받은 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평안이 있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 염려를 주님께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17) 우리에게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애써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구약성경만 가지고는 참 지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지혜를 찾고 구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분명히 알 수 있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참 지혜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오셔서, 말씀의 비밀을 풀어주시고, 이 땅엣 사는 동안, 늘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의 가장 큰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로 영접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늘 우리는 주님께 감사할 것 뿐입니다. 이 땅에서 잠시 잠깐 고난을 받고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늘 주님을 모시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참 지혜자 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지혜자인 것처럼, 교만하고 내 생각과 내 판단과 내 뜻만을 고집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고,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자아가 깨어지고 겸손히 주님의 뜻에 순복하게 도와주옵소서! 이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볼 때,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가 환난을 당할 것을 아시지만,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함께 계실 것을 믿습니다.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이 땅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주님께 기도드리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감사치 못한 것을 회개합니다. 생각을 고치고 말을 고치고, 행동을 고치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의 지혜자 되시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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