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왕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합니다. 요나단과 자신의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지요. 요나단은 상황이 급박함으로 다윗에게 일단 피하라고 합니다.
어디로 어떻게 피했는지 자세히 언급은 되지 않았지만, 사울의 신하들이 많았을텐데, 다윗이 피했습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피하게 하셨고, 은밀한 곳에 숨겨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최고의 정보 기관, 국정원에서 탈북민들을 검증합니다. 처음에 탈북민들이 조사를 받을 때, 자기 정보를 가능한한 숨기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만약에 자기가 남한에 내려갔다는 사실이 북한 당국에 들어가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가족이 전부 탈북하면 모르겠는데, 한 명 내지는 두 명이 왔다가 나머지 가족들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숨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국정원에서 자기 신상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때문에 놀란다고 합니다. 어떤 수단으로 알고 있는지 모르지요. 마찬가지로 사울은 왕인데,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정보가 자기에게로 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못 찾습니다. 왜 못찾을까요? 하나님께서 숨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3)
요나단이 다윗을 숨겨 주는 조력자 역할을 합니다. 왕은 죽이려고 하는데, 왕자는 살리려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을 두둔(斗頓)하고, 변호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4)
요나단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윗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실관계를 따져보면, 다윗이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을 뿐인 것이지요. 다윗이 사울 왕을 번역했다 든지 아니면 왕명을 어겨서, 큰 죄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잘못된 명령이라도, 사울 왕을 위해서 블레셋 사람들을 200명이나 더 죽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골리앗 장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만 생각해도 다윗을 곁에 두기 싫으면, 지방에 한 관리로 보내서 일하게 해도 될텐데, 계속 죽이려고 하는 사울은 무언가 씌운 것입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5)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이자 왕인 사울을 설득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큰 구원을 이루었고, 사울 왕도 기뻐하면서 칭찬하고 다윗을 높여 주었는데, 갑자기 다윗을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면서, 아주 논리적이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 합니다.
다윗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라고 또 지적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일반 국가가 아니라, 신정국가였기 때문에 왕이 하나님께 범죄한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통치 기반과 정당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사울에게 들도록 정곡(正鵠)을 찌릅니다.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6-7)
사울이 자기 말을 또 뒤집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합니다. 이런 맹세를 했기 때문에, 주위 신하들도 요나단도 다윗을 데리고 오고, 죽이지 않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사울이 뭐에 씌었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가 갈팡질팡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부분을 유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항상 일관되게 일하십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꾸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 귀신의 영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쳐죽이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8)
다윗은 항상 사울과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합니다. 전쟁이란 것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 아닙니까? 다윗이 사울이 자신을 자꾸 시기하고 미워하니까, 대충 전쟁하고, 방어에만 힘썼다면, 이렇게 계속 추격하고 죽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의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9-10)
요나단도, 신하들도 다윗을 죽이지 않으니까, 사울이 직접 창을 던져서 죽이려고 합니다. 악령이 사울에게 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앞부분이 참 이상하지요?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이렇게 나옵니다. 잘못 이해하면, 꼭 하나님께서 악령에게 사울이 다윗을 죽일 듯이 창을 던지게 시킨 듯 보입니다.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귀신이나 사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이나 악령들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고 싶어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손 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어보면, 욥의 고난 당할 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다 허락하시지만, 목숨은 건들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다윗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도 세상에서 담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악령도 우리를 해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이나 악령에 사로잡히면, 이렇게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속이고 죽이려고 하지요. 반면에 다윗은 왕 사울이 악령에게 시달리니까, 수금을 타서 치료해 보려고 사울 곁에서 애를 씁니다. 귀신은 은혜를 원수로 갚게 만들고, 반면 성령은 악을 선으로 갚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울처럼 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 예수의 영이 오셔야, 우리도 다윗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사울 왕과 다윗이 단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에게 누명을 씌워서 다윗을 긴급체포하려고 합니다. 아마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다 고면서, 내가 창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고 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매 그가 피하여 도망하니라.” (11-12)
이번에는 다윗이 집으로 피했는데, 아내이자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도망하도록 합니다. 아버지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자식들은 다윗을 살리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집안 사람들이 보아도 아버지가 잘못하는 것이고, 나라 전체를 놓고 봐도 왕이 잘못하고 있고, 백성들은 다윗이 옳다고 보는 것이지요.
“미갈이 우상을 가져다가 침상에 누이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사울이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이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13-14)
미갈은 다윗이 침상에 잠 자는 것처럼 꾸며 놓고, 병들어서 누워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나쁜 것이긴 하지만, 좋은 일, 선한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는 때로는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미갈이 다윗을 살리려 거짓말하고 시간을 벌어준 것은 잘한 일인데, 집안에 ‘우상’이 있으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러니까, 나중에 버림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훗날 다윗이 미갈을 되찾아 오고 왕후로서 예를 갖추도록 했지만, 다윗을 업신여긴 죄와 하나님 앞에 우상을 섬긴 죄로 인해서 생과부처럼 됩니다. 남편을 위해서 잘한 일도 있지만, 결국에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쓸쓸한 노년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또 전령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며 이르되 그를 침상째 내게로 들고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15)
전령들이 다윗 집에 왔다갔다 했지요. 그러는 사이 다윗은 벌써 멀리 도망갔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울은 다윗을 직접 죽이겠다고 합니다. 사울은 맹세했던 것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악령이나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신의(信義)’가 없습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안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맹세를 어겼기 때문에 사울이 죽을 죄를 하나 하나 쌓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사무엘서를 읽어가면, 사울이 맹세도 어기고, 율법도 어기는 장면이 여러 군데서 나올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 번 잘못했다고 바로 심판하시거나 죽이시지 않습니다. 이 죄가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일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전령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는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16)
전령들이 사울에게 가서 당신 딸이 거짓말을 해서 다윗을 놓쳤다고 보고 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17)
이번에는 미갈이 자기가 살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가 다윗을 도망치게 해 주고,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졸지에 다윗은 아내를 죽이려한 살인미수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 살자고 남을 이렇게 모함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 다음 장면에 다윗도 자기 살려고 ‘거짓말’을 하는데, 그것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범죄자의 가족이 범죄자를 숨겨 주거나 도와주는 행위에 대해서 ‘면책(免責)’ 해 줍니다. 처벌받지 않게 하지요. 그런데, 여기 왕이 자기 딸을 취조하는 것을 보니까 당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살겠다고 하는 거짓말은 본능인데, 이런 거짓말로 인해서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본다면 분명 그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이런 부분도 깊이 고민하고 내게 부당한 고난이나 환란이 닥쳐도 묵묵히 감내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요나단은 앞에서 다윗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변호했는데, 아내인 미갈은 그렇지 못했지요. 잔머리를 굴려서, 위기 상황만 잘 모면하면 되는 줄 알지만, 이렇듯 용기를 내어서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8)
다윗이 급한대로 도망을 쳤는데, 사무엘에게 갔습니다. 옛날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주던 제사장이자 사사가 아닙니까? 여기에 가면 무슨 해결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한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19-20)
다윗이 도망을 가 봐야 사울의 손바닥 안인데, 금새 사무엘 곁에 갔다는 것을 사울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을 체포하기 위해서 요원들이 출동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무엘 곁에 가서는 예언하는 영에 의해서 다윗을 잡지 않고,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예언을 했을까요?
자세히는 나와 있지 않지만, 첫째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과 둘째, 앞으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요원들이 잡으러 갔다가 그만 사울에게 돌아옵니다. 사울은 포기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또 보내지요. 좀더 실력있는 자들을 선발(選拔) 했겠지요?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새로 간 사람들도 똑같이 예언자들의 무리와 섞여서 예언을 하고 다윗은 잡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22-24)
요원들을 보냈지만, 함흥차사(咸興差使)입니다. 보내도 소식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예언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울이 직접 ‘라마’라는 곳으로 갑니다. 그곳에 가서 다윗과 사무엘을 찾는 중에 사울에게도 예언자의 영이 임해서, 다른 요원들과 다르게 옷을 벗고 꼬박 1일을 예언하고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참, 다윗이 잘 피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사울이 죽기까지 편안하게 지내면 좋겠지만, 사울을 피하면서 하나님께서 시키실 훈련이 또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쓰러지려 할 때에, 하나님 집에 와서 잠시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매일 이곳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계속 머물러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잠시 동안 쉼을 누리고, 또 다시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한 주간에 하루 정도는 주님 품에서 안식을 누리다가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에서 미움도 악의도 모두 사라지고, 주님의 뜻만이 온전하게 설 것입니다. 죄의 매여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사람도, 악령에 휘둘리고 조정을 받던 사울도 이곳에서는 모든 죄와 허물을 벗어 버리고, 주님 앞에서 참 안식과 치료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이 점점 명성을 얻어가므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했지만 요나단의 변호로 인해서 죽음을 면한 것을 보았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변호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처럼, 세상이 죄악으로 멸망해갈 때, 우리가 힘써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아버지 곁에서 중보하셨듯이, 우리도 이 땅에서 중보적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사랑과 성결의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도 구원하고,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어떤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친구삼아 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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