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m.blog.naver.com/naroodbae/220728024683>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1)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요청이 있어,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인’이란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고, 수많은 무리가 함께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장소를 옮겨 전도하시는데, 한 장례 행렬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와 장례의 무리가 나인 성 앞에 만나게 됩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2)
예수님은 그 장례 행렬을 그냥 지나쳐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멈춰 세웁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치셨을 때는 분명히 백부장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 나인 성의 과부가 예수님을 알아서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요구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3)
이 과부에게 남은 유일한 한 사람, ‘독자’가 죽었기에 이 여인의 슬픔은 너무도 컸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그런 충격일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이 여인의 아픔을 예수님은 공감하십니다. 그래서 요구받은 것도 아닌데, 이 여인을 위해 한 가지 큰 일을 행하십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4)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에게 명령하십니다.
“일어나라!”
살아있는 사람에게 명령해도 들어줄까 말까 하는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니요? 일반 사람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모두 명령의 대상이 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은, 그 청년이 관을 열고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가 말로 생명을 회복하고 다시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단지 말씀만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일하게 말씀만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생명이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5)
이 청년이 그냥 잠시 관에서 일어난 것 뿐이 아니라 움직여서 앉기도 하고 말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줍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되돌린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되찾게 된 어머니는 얼마나 기쁠까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6)
그 어머니 뿐만 아니라 이 장례에 참여 했던 이웃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까지 이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죽음의 무리가 예수님을 만나니 부활의 무리가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8-29)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은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우선 백부장의 종과 다르게 어떤 요청도 없이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해서 다시 살게 된 사건입니다. 이것은 인류 구원이 어떤 인간의 요청이나 간구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나 자신의 허망한 죽음과 멸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에 기인한 것입니다.
또한 나인 성의 과부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을 잃고 부활하여 얻은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합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진짜 독생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지요. 그래서 죽음의 행렬이 부활의 행렬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다시 살게 될 것을 또한 예표합니다. 죽음의 문, ‘관’에 손을 대신 예수님. 지옥의 문에 떨어진 모든 인류의 구세주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다시 살아납니다. 살아있으나 영혼이 죽은 자에게도 주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소성케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립니다. 이 나인 성 과부의 독자처럼, 모든 인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부활이 있고, 생명의 부활이 있습니다.
부디, 우리의 생명이 있을 동안에, 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영혼이 다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새 생명 얻은 자들은 마땅히 존귀와 영광을 주 우리 예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17)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여인들에게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남성에게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고, 남성과 여성 뿐만 아니라, 노인과 아이들, 가난하고 헐벗은 자에게도 동일하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을 묘사합니다. 7장 36절부터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여인이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자신의 사랑과 감사함을 주님께 전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이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7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이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서 구원받음에 감사해서 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의 이야기를 여기에서 이름없이 언급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아무튼 주님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린 이 여인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영원토록 전해진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36-39)
예수님을 한 바리새인이 초대하여 대접을 합니다. 그 때, 이름없는 한 여인, 성경에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합니다. 자신의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이 정죄받은 여인의 행동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이 죄인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그냥 놔두고 있고, 자기 것은 아니지만, 값비싼 것을 예수님의 발을 닦는데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바리새인의 불편한 마음을 아시고, 비유로 그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여자가 죄인인 것을 확실히 아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도 역시 예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자신은 의인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0-43)
이 바리새인은 이름이 ‘시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본 이름과 같지요.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인지도 모르는 ‘시몬’도 예수님은 용서하시지요. 그런데, 자기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하는 죄인도 예수님은 받아들이고 용서하십니다. 그 용서받은 은혜에 대해서 자각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시고 대접을 하겠습니까? 큰 죄인이라고 믿는 자가 더 예수님을 사랑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더 사랑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죄의 경중(輕重)이 있지, 사실 모두 사람은 지옥갈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바르게 성찰하고 은혜 의식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을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아끼는 것도 내어 드릴 수 있지요. 이 여인은 그렇게 했습니다. 반면, 시몬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니까, 죄인과는 구별해서 어울리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두둔하고 곁에 다가오는 죄인 여자를 불결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보기 싫은 것이지요.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29-31)
예수님은 시몬의 눈높이에 맞게 이 여인과 비교하면서 설명해 주십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일반적인 인사(입맞춤)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초대한 것이 맞을까? 합리적인 의심도 됨) 그리고 귀한 손님을 위해서 기름을 붓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자녀의 친구가 잠깐 집에 들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가장 냄새나는 발을 닦고 그리고 가장 여인들에게 비싼 재산 목록 1호를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높이는 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공개적으로 그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공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데, 누가 토를 달 수 있습니까? 즉,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 간과하시고 넘어가시겠다는데 누가 그 여인을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몬은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교만으로 이 여인을 죄인 취급하며 자신과는 다른 부류로 생각했습니다. 이 교만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끕니다. 혹시 우리들은 그런 착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구원받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니,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48-50)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셨고, 죄를 용서하셨으며,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에 집중하고, 항상 그 은혜를 보답하는 삶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세입니다. 우리를 옳다고 판단하시고 구원을 베푸실 이는 주님이십니다. 다른 이들의 손가락질과 비난과 정죄에 함몰되고 좌절하기 보다 죄인을 맞아주시고, 용서하시는 주님 앞에 나와 주님 앞에 겸손하게 우리의 무릎을 꿇고,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와 사망과 고통을 보시며 은혜를 베푸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죽음의 무리가 부활과 생명의 무리가 되었듯이, 우리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올리는 거룩한 무리가 되게 인도하옵소서!
주님의 자비와 용서하심을 받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고 눈물로 주님을 섬긴 한 여인의 섬김과 겸손을 보았습니다. 반면, 주님을 초대한 시몬은 주님을 바르게, 주님답게 모시지 못하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여인을 정죄했습니다. 우리들은 시몬같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만을 높이며 섬기는 이 이름없는 여인처럼 주님을 기뻐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모든 허물과 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속하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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