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의 뿌리 깊은 종교 관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나 부유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내려 주신 ‘복’이라는 신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모두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된 것을 근거로 합니다. 이를 테면,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 땅으로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자기 집에 318명의 사람을 길러낼 정도로 부자였고, 그 아들 이삭도 블레셋 땅에서 농사를 지어 100배나 소출을 내고, 우물을 소유할 정도로 부자가 됩니다.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도 혈혈단신 하란 땅에 가서 20년 동안 살면서,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갔다가 엄청난 양 떼와 자녀들과 부인들을 얻어서 가나안 땅에 돌아왔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 가나안 지역에 큰 가뭄과 기근이 들 때에도 요셉을 통해서 이집트 고센 땅에 살게 될 때에 그 자손들이 심히 번성하였습니다.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생활을 했지만 이집트를 나올 때에는 은, 금 패물을 가지고 수많은 양과 소를 몰면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유대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땅에서 부자로 살고, 복을 주시며 권세와 명예를 누린다고 믿습니다. 아주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시각으로 볼까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살이 썩고 문드러지는 문둥병(한센씨 병)에 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되고, 공동체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고 율법의 나온 대로 행동합니다.
기독교 초기에 개종한 유대인들도 이 뿌리깊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가난한 형제를 냉대하고 차별하는 관행이 있음을 봅니다. 가난한 사람은 회당 예배에서 좋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맨 뒤에서나 겨우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16장 앞에서 불의한 청기지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부를 추구하고, 그 부를 이용하여 형제를 착취하고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런 자들을 ‘한 부자’의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19)
예수님 당시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보통 자색은 귀족이나 아주 큰 부자들이나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 부자이기때문에 나가서 일할 필요도 없고, 하인들이 모든 일을 했겠지요. 그 부자가 하는 일이라야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 뿐입니다. 어쩌면, 헤롯 왕가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0-21)
그 부자의 대문 곁에는 한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나사로’이지요. 공교롭게도 이 이름이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 남매의 오빠와 같은 이름입니다. 베다니의 나사로는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 사람이 죽어 무덤에 안치되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시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베다니 마을은 가난한 사람과 문둥병자들의 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도 문둥병이나 아니면 악성 피부병에 걸려서 격리되어서 살았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비유를 깊이 들여다보면, 한 부자는 예루살렘 성 안의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표하는 듯 보이고, 이 거지 나사로는 베다니 마을의 예수님을 영접한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개들’은 무엇일까요? 만약 비유를 확대한다면, 유대인들이 개, 돼지와 같은 짐승취급을 했던 ‘이방인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꼭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2-23)
살아 있을 동안에는 부자는 호의호식(好衣好食) 했고, 나사로는 질병과 가난 속에 고통을 받았지만, 죽어서 간 사후세계에서는 정반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나사로는 모든 유대인들의 아버지로 대표되는 아브라함 품에 있습니다. 안식을 누리고 행복합니다. 반면, 부자는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음부에서 고통받던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고 부탁합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4)
이 부자는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볼 때, 이 부자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또 이 부자는 자신의 대문 옆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나사로가 자기 똘마니(?)로 생각합니다. 자기를 위해 이 음부로 내려와서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 밑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영원히 자기 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5-26)
아버지라고 여겼던 아브라함은 딱 잘라 거절합니다. 2가지 이유인데,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아 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사후세계에서 받을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음부의 세계와 낙원의 세계는 분리가 되어서 서로 왕래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7-28)
부자는 자신의 요청이 거절되자, 다른 것을 요구합니다. 그 요구는 ‘형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친 형제들이었지요. 자신처럼 이 음부에 와서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과 간절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었지만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좀 보내달라고 합니다. 형제들이 나사로를 보면 나사로의 말을 잘 들어서 음부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잘못된 믿음이지요. 또, 여전히 자신의 꼬붕(?)으로 나사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29-30)
여기 아브라함의 말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 같은 분들이지요. 모세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사라진 것입니까? 아니요. 율법도 필요하고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도 필요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구약도 신약도 모두 필요합니다. 성경의 한 부분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윤리, 도덕도 있고, 행동 강령도 있습니다. 이 땅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지침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심지어 음식 규례도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먹을 것을 가려 먹게 하시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과 책임과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의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은 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그냥 눈물 흘리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과 가치관이 새롭게 정립되는 것입니다.
부자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별개로.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부자처럼 살아갑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주인은 ‘자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 우리들도 잘못하면 이 부자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나의 아버지로 착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야.’ 말씀한다면 끝장입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31)
그렇다면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 품에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까요? 그는 모세와 선지자로 대변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때로는 그 말씀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고 질병이 닥쳐도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습니다. 때로는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아 버림을 받고, 짐승들과 같은 사람들 속에 거할지라도 그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했으며, 죽기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기억했고, 그를 위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곳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었습니다. 더 이상 괴롭힘과 종살이와 하대와 멸시, 천대를 받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들도 주님께 인정을 받고, 기억에 남는, 주님께서 알아 주시는 참 성도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길이 때로는 괴로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묵묵히 인내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이,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사는 교만한 부자의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내 혈연만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함께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선배를 주시고, 목회자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잘 듣고, 배우며 깨닫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주셔서, 주시는 말씀대로 우리 삶에 잘 적용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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