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1-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결론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대부분 기도는 하지만 기도하고 낙심을 하던지, 기도한 것조차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반복되면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세상적인 방법을 찾던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게 됩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3-5)
어떤 도시에 재판관이 한 과부의 집요한 요구를 듣게 됩니다. 무슨 일인지 상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억울한 일을 풀어달라고 재판관에게 거듭 요청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소송을 뇌물 준 사람이 원하는대로 판결해 주기도 했는데, 이 과부는 아무런 뇌물이나 자그마한 성의(?)도 없이 자꾸 귀찮게 합니다. 다른 여러 가지 뇌물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재판을 놔두고 이 과부의 사건을 맡아서 해결해 줄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법정에 와서 재판관에게 민원(?)을 넣으니, 자기 체면도 있고 해서 빨리 과부의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6-8)
예수님께서 비유로 한 불의한 재판관을 들어서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님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도 집요하게 요청하면 들어주는데,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신데,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기도에 관한 교훈인데, 예수님의 설명을 잘 들어보면, ‘원한’에 대해서 갚아주신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꽤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들을 당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으로 여겼으니, 정통 유대교에서는 출교를 당하거나 유대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 것입니다. 직장이나 공직에서도 매우 불의한 처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원한(?)’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또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상황을 아시면서도 당장에는 예수님께서 그런 모든 박해나 탄압을 막아주실 것처럼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도 관리들에게 붙잡여서 고초를 당하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판입니다. 복음서의 끝자락에서 아주 가까운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쁜 상황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 때문에 빼앗긴 재산이나 명예나 망가진 삶에 대해서 어떻게 보상이 되고, 회복이 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면, 결국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든지, 이방 사람들처럼 로마 문화에 동화되어서 황제의 식민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낙심’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그저 시류에 맞게 흔들리는 갈대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혹은 예수님께서 그런 ‘원한’을 갚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때는 언제일까요?
“인자가 올 때”입니다. 세월이 2천 년이 흐른 지금, 우리들이 이 말씀을 들을 때는 상당히 충격적인 메시지이지만, 예수님과 당대에 살면서 박해와 순교를 당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3일만에 살아나셨고, 하늘로 승천하셨지만, 곧 이 모습 그대로 내려오실 것이라 약속하셨기 때문에 수 년 내에 혹은 열두 사도가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참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할까요? 우선 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나 악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세잡은 어둠의 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시기 할 수 있는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필요 이상으로 갖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경쟁하고 권력다툼을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 때문에 그것을 빌미로 박해나 탄압이 더해 질 수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 시절에 레갑 자손의 요나단이 후손들에게 ‘너희는 집을 짓지 말고 장막에 거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교훈 했습니다. 레갑 자손들이 조상의 유지를 받들어서 장막에 거하면서 포도원이나 땅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 때에 발빠르게 도피할 수 있었고, 과도한 물질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제국에 의해서 재산이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개발도상국의 지위에 있을 때에는 여러 가지 무역과 세계 규약에 이점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OECD 국가가 되어서는 선진국들의 견제와 규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좀 살게 되니까, 패권국이 ‘돈’을 뜯어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1997년 IMF도 그렇게 해서 왔고, 우리보다 앞서 1980년대 일본도 플라자 합의를 통해서 산업 경쟁력을 잃게 되고, 국부도 잃게 됩니다.
성도들이 지나치게 이 땅에서 재물을 쌓고 성공을 위해서 일하면, 안 그래도 미움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더욱 성도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성도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서 나누고 섬길 필요가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지요. 박해를 받게 된다고 해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는 딱히 그 억울한 사연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과도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 전에 역사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드물지도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서 첫째, 슬기롭게 박해와 고난을 견뎌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모든 보복과 심판과 보상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괜히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셋째,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면서, 믿음을 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신다는 뜻일까요?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하고 있는지 삶을 보겠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는 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박해가 있다고 고통이 있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 다른 신과 우상에게로 가 버린 사람은 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 순교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고 순교를 통해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순교 당하지 않고 박해가 일어났을 때, 잘 피하여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고, 믿음의 후손을 남기는 것이 가장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숨고 피할 곳이 없어 최후를 맞이할 때, 당당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면,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믿음인 것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9)
예수님께서 또 교훈하시는 내용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지 말고, 다른 사람도 멸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기도하는 두 사람을 대비시켜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0-12)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얼마나 열심히 십일조도 하고 금식도 하고 기도합니다. 이 바리새인이 잘못하고 있습니까? 십일조도 하나님께 당연히 드릴 것이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이 사람의 고백을 통해서 보면, 권력이 있지만, 남용하거나 오용해서 다른 이의 것을 빼은 일도 없고, 사람들에게 실수한 일도 없고, 성적으로도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한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3)
세리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고, 잘못만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낫다고 하신 걸까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4)
바리새인은 자기 스스로 높이는 ‘교만’이 큰 죄인 것입니다. 태도와 자세가 잘못되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교훈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은 것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잘난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내 옆의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자신이 꽤 나은 사람, 좋은 사람, 선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예수님을 전할 때, ‘죄인’임을 상대방에게 알려 주면, ‘내가 왜 죄인이냐?’ 하면서, 감옥에 들어갈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우리의 수준이 그렇습니다. 사회적 범죄자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이나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그런 살인자나 강도, 도둑은 행동으로 드러난 죄인일 뿐입니다. 우리 속 사람이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이미 마음으로 살인한 것으로 말씀합니다.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온갖 악하고 음란한 생각으로 우리들도 범죄한 자들입니다.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인데, 사형 선고 유예를 받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 잘났다고 교만하고 오만하니 예수님 눈에 참 역겹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에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항상 겸손하게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기도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의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면, 마치 채권자가 당연히 받을 돈을 요구하듯이 아버지께 구하는 뻔뻔함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기도 자체를 하지 않는 그런 불신의 사람들보다야 낫겠습니다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항상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요구만을 주장하고 끝나 버리는 그런 갓난 아이와 같은 기도보다 주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높이는 찬양의 기도를 항상 드리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새겨져서,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들게 하시고, 우리가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기게 힘 주옵소서!
슬기롭게 세상을 살아가되, 성도답게 거룩하고,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게 하옵소서! 항상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대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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