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2장 (2) 체포, 구금, 재판누가복음] 22장 (2) 체포, 구금, 재판

 

<이미지 출처, https://skybluegirin.tistory.com/2284>


* 기도하시는 예수님 (39-46)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39-40)


 예수님께서 매일 밤늦은 시간이나 새벽마다 기도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새로운 명령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느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다 졸고 잤다고 표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는 사역도 매우 힘든 일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밖으로 나가 감란산으로 가는 산길이나 이동을 무슨 가마타고 이동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걸어서 다니셨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피곤한 중에서도 ‘기도’를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다 생략하고 빠지고 하는데, 그럴 때 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하는 ‘유혹’이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맞딱뜨리는 유혹이 예수님이 받으시는 유혹과는 다를텐데,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예수님의 사역을 행할 때에 비슷하게 맞게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가장 큰 유혹은 ‘십자가’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순간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은 연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 닥치는 유혹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유혹이겠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여서 제자들은 이 유혹 앞에 모두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항상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는 제자들이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답게 예수님을 항상 드러내면서 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1-43)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사도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힘을 더했는지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에 천사를 보내시든지, 아니면 성령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손길은 기도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4-46)


 예수님 입장에서는 참 ‘믿을 놈’이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기도 외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던 제자들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들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자꾸 예수님께만 기도를 의탁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직접 하늘 아버지께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 가룟 유다의 배반 (47-53)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47-49)


 드디어 제자들 중에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지 모두 알게 됩니다. 나머지 제자들이 심히 분노하여 칼로 가룟 유다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류하셔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유다를 뒤따르던 군사들을 보고 제자들 모두 급하게 도망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0-51)


 다른 복음서에 ‘말고’라는 사람이 유다 대신에 칼을 맞아 귀가 잘려 나갔는데, 예수님께서 귀를 붙여서 낫게 하십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도,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2-53)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없이, 한 밤에 잡혀 가십니다. 어떤 인권조항을 읊어주는 것도 없이 불법으로 잡히신 것입니다. 어둠의 영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이 저지르는 짓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 언론에서 이런 것을 고발하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언론도 타락해서 악한 자 편에서 돈을 받고 여론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죄있게 만들지요. 우리가 아는 사건들이 조작된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 앞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때에 그 죄값을 치를 것입니다. 


* 베드로의 부인 (54-62)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4-57)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지요. 베드로는 자기가 재판을 받는 것도 아닌데, 대제사장집 하녀가 베드로를 보고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한밤에 엉뚱한 곳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이것도 불법이지요. 불법심문과 재판을 받습니다. 정식 재판을 거치거나 변호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58-60) 


 예수님의 예언처럼,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마지막에서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으로 선을 긋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이 어쩌면, 불의가 판 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네 모습입니다. 누구나 용기있게 진리를 수호하지 않습니다. 그 댓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모두 입을 다물거나 외면하거나 심지어 거짓말을 지어내기도 합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1-62)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제자 베드로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눈이 예수님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밖으로 뛰쳐 나가지요. 우리들도 진리를 외면하고 저버릴 때, 주님을 보고 계십니다. 


* 고문 (63-65)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3-65)


  예수님은 피의자 신분으로 어떤 변호를 받지도 못한 채, 인권유린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겪으셨기 때문에 억울하게 학대받고, 누명을 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니는 진짜 죄인들이 많은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드러날 것입니다. 


* 불의한 재판을 받으심 (66-71)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6-68)

 

 대제사장들이나 백성의 장로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세상 왕을 칭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불의하게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서 자기들이 하는 이런 체포와 재판이 정당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밤새 구타와 폭행으로 거짓 진술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영혼구원의 메시야임을 선포하지도 않으시고, 저들의 거짓 선동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묵비권’이란 것이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께서 처음 행하신 것 같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죄인으로 몰린 사람이 어떻게서든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변호하려고 하지만, 말꼬투리를 가지고 실수한 것으로 유죄를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지요. 고문이나 심리적인 기술들은 가지고 연약한 인간을 죄인 만드는 것이 악한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럴 때는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어쩌면 최고의 변호(?)일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69-71) 


 예수님은 그냥 수비적으로 변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인들에게 예수님을 죽일 사유를 제공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의도대로 재판이 진행되게 하시지요. 즉, 종교재판으로 예수님의 죄를 몰아가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어야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악한 소작농 비유에서처럼, 주인의 아들을 죽여 유산을 빼앗으려는 악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자신들의 꾀와 함정에 스스로 빠져든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어서 이들을 모두 제거하려 하셨다면 못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희생하셔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려는 더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악한 자들이 쓰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지식은 참으로 깊고 크고 넓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불의한 일들과 환란과 사건들이 모두 주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신실한 믿음과 거룩한 소망을 연단하기 위해서 때때로 악한 일들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그 때마다 주님을 깊이 묵상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가 가야 할, 해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시고 성령께서 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불의하게 체포를 당하시고 구금당하시며, 고문과 환난을 받으셨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현상만 보고 좌절하고 낙심치 말게 하시고, 기도함으로 깨어 있어 죄악의 유혹에, 시험에 넘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운 희망과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게 하시고 각 사람 마음에 주님의 법이 다스리게 하옵소서! 


 사회 곳곳에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이 없게 하시고, 정의롭고 공의로운 재판이 이뤄지게 하시며,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주님의 법으로 다스려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시는 존귀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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